예술·문학

‘정도전 붐’ 뒤에 숨은 무의식적 진실

팔벼게 2014. 5. 28. 13:05

 

네덜란드 출신의 신학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왼쪽)와 프랑스 출신의 신학자 장 칼뱅이 동맹을 맺는 모습. 포이에마 제공

   KBS 사극<정도전>이 방영되면서 정도전 관련 책이 여기저기서 쏟아집니다. ‘사대부의 나라’로서 조선을 디자인한 혁명아로서 정도전 조명했던 책들이 너도나도 “내가 원조”라면서 앞 다퉈 재출간됩니다. 조선을 탄생시킨 일등공신에서 만고의 역적으로 저주 받은 그의 극적 생애를 극화한 소설도 쏟아집니다. 이런 ‘정도전 붐’ 뒤에 숨어있는 우리사회의 집단무의식은 뭘 말하고 싶은 걸까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운위되는 현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 속에 역설적으로 새로운 이념을 제시할 ‘신념의 인간’에 대한 갈증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새로운 왕조의 출현에는 반드시 그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합니다.  중국의 무수한 왕조가 150년~200년의 짧은 수명을 지녔던 것도 새로운 이념과 신념의 인간이 왕조교체를 촉진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한반도의 신라, 고려, 조선이 500년~1000년의 긴 수명을 지녔던 것은 그만큼 새로운 이념과 신념의 보급과 확산이 뒤쳐졌다는 반증입니다. 

 

  한국 역사에서 고려의 건국이 선종 불교의 전파와 결부돼있고 조선의 건국이 성리학의 전파와 연관돼 있다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기독교 전파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닙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주자학이 양명학과 고증학, 천주학으로 대체되는 동안 이념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사회의 수백 년에 걸친 이념적 갈증과 허기를 채워준 것이 기독교(특히 개신교)였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를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인 북한과 대비해 남한에서 더욱 뚜렷합니다. 정작 한국인은 이를 잘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서양인들이 남한의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십자가의 숲에 경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대한민국 건국의 지도적 이념이 됐던 한국 개신교가 총체적 위기에 봉착했다는 경고음이 도처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들의 일탈과 비행, 교계 내부의 반목과 갈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집니다. 하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는 교계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비행에 대한 죄의식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최근 발표한 ‘2013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서 개신교신뢰도가 21.3%로 가톨릭(29.2%)이나 불교(28.0%)보다 낮게 조사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양식 있는 기독교도들은 이런 현상을 일부 목회자들의 개인적 일탈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침례교 신학자로 최근   <천하무적 아르뱅주의>(포이에마)를 펴낸 신광은 목사(46)의 진단은 다릅니다. 목사가 지은 개개인의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개신교 전체의 신학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한국 개신교가 양립하기 힘든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적당히 짬뽕한 정체불명의 ‘아르뱅주의’에 빠져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프랑스 출신의 신학자 장 칼뱅(1509~1564)이 창시한 칼뱅주의와 그 손제자격인 네덜란드 출신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1560~1609)가 창시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400년 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한 때 아르미니우스주의가 패배하는 듯 했으나 18세기 감리교를 창시한 영국의 신학자 존 웨슬리(1703~1791)를 만나면서 부흥했습니다.

 

  핵심은 구원에 대한 관점의 차이입니다. 장로교의 뿌리 격인 칼뱅주의는 내가 구원을 받을지 여부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미리 정해놨다는 예정론에 토대합니다. 내가 기독교도가 되느냐 마느냐도 예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단 인간의 지혜로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신실한 신앙생활(내적 증거)과 도덕적 실천(외적 증거)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살짝 엿볼 수 있을 뿐입니다. 칼뱅주의자들이 도덕적 삶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반면 감리교의 뿌리격인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예정설을 부인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미리 결정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주체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구원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부인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구원받을지 아닐지를 예지하고는 있지만 미리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만 영접하면 구원이 가능한것인가? 아닙니다. 인간은 언제든 다시 타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회개와 보속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매주 교회에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불교로 치면 칼뱅주의는 돈오론이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점수론입니다. 성리학으로 보면 칼뱅주의는 주리론이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주기론입니다. 조선의 당색으로 치면 칼뱅주의는 벽파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시파입니다. 신학자들이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불과 물처럼 섞이기 어렵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한국 개신교가 편의에 따라 이 둘을 마구잡이로 뒤섞은 ‘폭탄주 신학’에 빠져있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영접했으니 구원 받았다는 주장을 할 때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내세우다가 자신들의 윤리문제가 불거지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칼뱅주의로 도망칩니다. 남의 신앙엔 아르미니우스주의, 자신의 신앙엔 칼뱅주의를 적용하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정체불명의 팔자주문만 외워대기 바쁩니다.

 

   “목사라고 하는 자들이 간통을 하고, 논문을 위조하고, 여신도들을 성추행하고, 불법으로 세습하고, 교회의 재정을 제멋대로 유용하고, 배임하더라도, 그러한 온갖 악행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선택받았으니 무조건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칼뱅주의의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기꺼이 가져다 쓴다.”

 

  “아르뱅주의는 구원의 길을 조금이라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있으면 이를 가차 없이 제거하여 가급적 쉬운 길로 만들어버린다. 즉 아르뱅주의자들은 택자들에게만 구원의 문이 제한적으로 열려있다는 칼뱅주의를 거부하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있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기꺼이 선택한다.”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조화롭게 통합하려는 흐름을 칼미니즘(Calminism)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선 두 신학의 통합은 최악의 형태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미니즘’이 아니라 ‘아르뱅주의’라는 신조어가 탄생한 것입니다.  신광은 목사는 이런 아르뱅주의가 개신교가 그토록 증오했던 ‘면죄부’로 작동한다고 맹비판합니다.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개신교의 정신을 배반하고 예수의 숭고한 가르침을 ‘값싼 구원’으로 팔아넘긴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드라마 속 정도전이 고려 권문귀족을 향해 토해내는 사자후를 조선후기 사대부들에게 고스란히 적용해도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이는 것과 너무도 닮지 않았요? 새 시대를 이끄는 이념도 시간이 지나면 변질됩니다. 권력만 부패하는 게 아니라 이념도 부패합니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이념과 결별’이 아니라 ‘이념의 혁신’입니다.

 

  춘추시대 공자의 유학이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이어가는 것은 전국시대 맹자와 순자, 한대 동중서,  송대 주희, 명대 왕양명, 청대 고증학으로 끊임없이 혁신을 이뤘기 때문입니다. 중동에서 태어난 일신교가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된 것도 모세의 유대교,  예수의 기독교, 무함마드의 이슬람교, 루터의 개신교, 로욜라의 예수회 개혁운동으로 시대변화에 맞춰 변신을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의 덫’에 빠진 한국의 개신교에 지금 필요한 것도 그런 혁신입니다. 혁신의 순가을 놓치는 순간 고려말의 불교, 조선말의 주자학과 같은 운명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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